인문학

제1·2차 세계대전과 신학의 위기: 인간, 전쟁, 그리고 신을 향한 질문

어게인60 2025. 5. 15.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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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세계대전과 신학의 위기: 인간, 전쟁, 그리고 신을 향한 질문



1. 전쟁이라는 시대정신: 신은 어디에 계셨는가?

1914년, 유럽 대륙을 휩쓴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총력전(total war)'이라는 개념을 불러왔습니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후퇴했고, 총검과 포화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스러졌습니다. 기독교가 뿌리내린 유럽에서, 수많은 신자는 묻기 시작했습니다. “신은 어디에 계셨는가?”

전쟁은 단지 정치적,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학적 충격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왜 무고한 생명을 지켜주시지 않았는가? 유럽 전역의 교회들은 이 질문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2. 신학의 황혼: 독일 신학과 제국주의

특히 독일에서는 국가주의와 결합한 신학이 뿌리 깊었습니다. 개신교 신학의 본산이라 불린 독일은, 루터 이후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결합하며 전쟁의 명분에 종교를 입혔습니다. 많은 독일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황제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로 묘사하며, 전쟁을 신성한 임무로까지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전쟁은 더 이상 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고, 수백만 명이 죽어나가는 참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이후 독일 신학은 침체기를 맞으며, 자기비판과 성찰의 시대로 들어갑니다.


3. 바르트와 신학의 전환점: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인물 중 하나는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입니다. 그는 독일 교회가 전쟁을 정당화한 것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특히, 독일 지성인들이 황제의 전쟁 선포에 환호하던 1914년, 바르트는 고향 스위스로 돌아가 자신만의 신학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는 기존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비판하며,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곧 유럽 신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며,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바르트는 신학을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재단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4. 2차 세계대전과 교회의 침묵

하지만 신학의 위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 정권과 교회의 관계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오릅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후, 독일 국민에게 강한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일 교회는 이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지지했습니다.

그중 일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양심에 따라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교회는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택했지만, 그 침묵은 결과적으로 악에 대한 방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5. 본회퍼의 선택: 신앙과 저항

이 시기 가장 강렬한 신학적 인물은 바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입니다. 그는 젊은 신학자였지만, 나치 정권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의 대표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본회퍼는 **“값싼 은혜”**라는 개념을 비판하며, 진정한 제자의 삶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모의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1945년 교수형을 당합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기독교인은 악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실천적 신학으로 답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6. 유대인 대학살과 신학의 침묵

홀로코스트는 기독교 신학이 맞이한 가장 깊은 어둠이었습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의 시스템에 의해 체계적으로 학살되었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이후 유럽 신학계는 신학적 양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되며, “왜 하나님은 침묵하셨는가?”에 이어 “왜 교회는 침묵했는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엘리 위젤과 같은 유대인 작가들은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고,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조차 “신학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가능한가?”라는 자문을 던지게 됩니다.


7. 전쟁 이후의 신학: 현실 참여와 윤리

전쟁을 두 차례 경험한 신학은 더 이상 교리만 이야기하는 학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와 한계, 공동체의 책임, 윤리적 실천 등 현실 참여형 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과 같은 다양한 신학적 흐름은 이러한 시대적 반성을 바탕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신학은 강단을 넘어 거리로, 정치 현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8. 한국 교회의 교훈: 전쟁과 분단의 신학

한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과 분단은 한국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속에서 한국식 고난 신학이 형성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미국 선교 중심의 교리 교육이 주류였지만, 점차 민중과 함께하는 신학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의 삶을 민중 속에서 해석하며,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신앙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전쟁은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신학을 더욱 현실적이고 민감하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9. 현대 신학의 과제: 다시 묻는 하나님

오늘날 신학은 여전히 고뇌 중입니다.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기술은 더욱 발전했지만 인간의 욕망과 탐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분쟁, 기후 위기, 빈부격차는 신학이 다시 현실을 마주하도록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질문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쟁과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신을 말할 때, 그것은 단지 형이상학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 그리고 책임의 언어여야 할 것입니다.


10. 위기의 시대, 신학은 끝났는가?

제1·2차 세계대전은 단지 전장의 승패를 가른 사건이 아니라, 신학이 근본에서 흔들리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위기 속에서 가장 진지한 신앙 고백과 가장 깊은 신학적 질문이 탄생했습니다.

신학은 결코 ‘완성된 답’을 제시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고통받는 인간의 자리에서 신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전쟁 속에서 흔들린 신학은, 이제 더 이상 강자의 편이 아닌 약자의 편에서, 더 이상 이념의 수단이 아닌 삶의 진실한 해석자로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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