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60

bolg-sunny60 님의 블로그 입니다.

  • 2025. 5. 13.

    by. 어게인60

    목차

      반응형



      1.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박해의 그림자

      기독교는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 속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유대인을 ‘예수 살해자’로 규정한 중세 교회의 가르침은 종교적 편견을 사회적 증오로 확대시켰고, 이는 수세기에 걸친 구조적 박해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유럽 기독교와 유대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살펴보며, 박해의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고찰해 봅니다.


      유럽 기독교와 유대인 박해의 역사



      2. 초대 교회와 유대교의 분리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분파된 신앙으로 시작됐습니다. 초기에는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집단으로 간주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비(非) 유대인 중심의 선교가 확대되었고, 결국 유대교와의 분리와 긴장이 발생했습니다. 2세기 이후 교부들은 유대인을 ‘완고한 민족’으로 묘사하며, 기독교의 참된 계시를 거부한 집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거리는 결국 유대인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민족’으로 보는 견해로 이어졌고, 이는 훗날 박해의 정당화 근거가 되었습니다.


      3. 중세 교회의 반유대주의 교리 확산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 차별은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의 교회는 유대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경제적 활동에 제약을 가하거나 게토(ghetto)로 격리했습니다. 교회는 유대인이 ‘신의 살해자(deicide)’라는 교리를 퍼뜨렸고, 이로 인해 부활절이나 성탄절 무렵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외출을 금지당하거나 모독죄로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4. 십자군 전쟁과 유대인 학살

      1096년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박해를 더욱 격화시킨 계기였습니다. 십자군은 성지로 향하는 길목마다 유대인을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며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의 손에 살해당했습니다. 이 시기의 학살은 종교 전쟁의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교황청은 암묵적으로 이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 유대 사회는 깊은 공포와 트라우마에 빠졌습니다.


      5.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오해와 낙인

      중세 후반으로 갈수록 유대인은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기독교가 고리대금업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대인은 종교 율법상 이방인에게 이자를 받을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대부업이나 환전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유대인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금융업자로 비하되었고, 민중의 분노가 경제적 위기 시마다 유대인에게 쏠렸습니다. 유대인은 ‘돈만 아는 민족’으로 낙인찍혔고, 이는 근대 유럽의 반유대주의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흑사병이 유행하던 14세기에는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거짓 소문이 퍼지면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오해는 단순한 편견을 넘어 사회적 폭력으로 연결되었고, 이후 수세기에 걸쳐 반복되는 정치적 희생양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6. 종교개혁과 마르틴 루터의 반유대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초기에 유대인의 개종을 기대하며 우호적 입장을 취했으나, 이내 태도를 바꾸어 극단적 반유대주의로 돌아섭니다. 그는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1543)라는 글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태우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거주지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사상은 독일 내 반유대주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도 인용되는 등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7. 계몽주의 시대와 유대인의 시민권 운동

      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 관용, 평등을 강조하며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시민권을 얻기 시작했으며,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회 전체의 편견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며 사회적 통합을 거부했습니다. 법적인 권리와 사회적 차별 사이의 괴리는 이후 유대인 이민과 시온주의 운동의 배경이 됩니다.


      8. 홀로코스트와 기독교의 침묵 

      20세기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는 유럽 유대인 박해의 절정이자, 오랜 반유대주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하는 동안, 상당수 기독교 교회는 침묵하거나 방조했습니다. 일부 성직자들은 유대인 구출에 나섰지만, 교황청과 주요 교단은 대체로 침묵을 유지하며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전후 기독교는 도덕적 신뢰를 상실했고, 유대인과의 관계 회복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나치의 만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의 침묵을 ‘도덕적 실패’로 간주합니다. 반면,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과 수도자들은 생명을 걸고 유대인을 숨겨 주었으며, 이러한 사례는 훗날 ‘의로운 이방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기록되어 기독교 내 저항의 목소리도 함께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화해의 시작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Nostra Aetate(우리 시대에)』 선언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유대인을 ‘예수 살해 민족’으로 보던 관점을 공식적으로 폐기했습니다. 교황청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공동 뿌리를 강조하며, 과거의 박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화해를 촉진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러 개신교 교단도 유사한 입장을 발표하며, 유대교와의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오늘날 유럽 기독교는 과거의 반유대주의 유산을 반성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다시는 혐오와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응형